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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김형석의 100세일기] 손녀에게 알려주고 싶은 두 미국인
작성자 인문학박물관관리자 날짜 2020-11-05 14:05:50 조회수 4725

강원도 양구 ‘철학의 집’ 내 전시관에는 두 미국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나와의 관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 사람은 미국 선교사이면서 숭실전문학교 학장이었던 E.M. 모리(Mowry·1880~1971) 목사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10여 년 동안 많은 사랑을 베풀어 준 은인이다.

그는 생물학 교수였으나 젊었을 때 고전음악클럽 회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에 와서는 1910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찬양대(성가대)를 창설해 직접 지휘했고 부인은 반주를 맡았다. 학생 합창단을 이끌어 주기도 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교회음악 보급에 공헌했고 숭실학원은 많은 음악인을 배출했다. 내 선배였던 작곡가 김동진, 테너 이인범은 학생 시절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다.

3·1운동이 평양에까지 파급되었을 때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등사기로 찍어낸 곳이 모리 목사의 자택이었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숨어들어 온 젊은이들을 보호해 주기도 했다. 그런 사건들 때문에 일경에 조사받고 구속되었다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때 찍힌 사진을 보면 방갓을 쓰고 있어 누군지 모를 정도다. 감옥에 가지는 않았으나 19일간 구치소에서 고생했다.

모리 목사가 미국으로 떠날 때는 아무도 모르게 나를 불렀다. “다시 보기 어렵겠다”면서 함께 기도를 드렸다. 한국의 독립과 내 장래를 위한 기도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전날 밤에는 꿈에 나타나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것을 암시해 주기도 했다.


광복 10여 년 후에 내가 그의 편지를 받은 것은 연세대에 부임하고 얼마 후였다. 오랫동안 나에 대해 수소문하다가 연세대 교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심과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그 긴 세월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던 것이다.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다른 한 사람인 J.H. 웨어(Ware) 교수는 1970년대 초 감리교 박대인 선교사 소개로 만난 뒤부터 30년 가까이 우정을 나눈 후배다. 미국 교수들에게는 나에 대해 “형님처럼 지내는 친구”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20세까지는 중국 상하이에서 살았다. 외모는 서양 백인이지만 정서적으로는 나와 비슷한 동양인이었다. 1972년에는 자기가 근무하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대학에 나를 객원교수로 초청했다. 한 학기 동안 두 가족이 함께 지냈다. 내 막내딸을 그 대학의 장학생으로 선발해 졸업할 때까지 돌보아 주기도 했다. 내 아내가 병중에 있을 때는 부부가 문병을 왔을 정도로 마음씨가 따뜻했다. 지금은 부부가 다 세상을 떠났다. 항상 내 건강을 걱정하던 친구였는데….

돌이켜보면 이렇게 선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인연들이 있어 역사의 별빛으로 남는 것 같다. 지금은 내 딸 부부와 외손자가 모리 목사의 고향인 오하이오에서 교수와 의사로 봉사하고 있다.

손녀가 친구들과 양구에 간다고 해서 내 삶의 한 모습을 알려주고 싶었다.


출 처 :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0/10/24/PXPNHJZPCJGILMGI6QRUK7FDV4/?utm_source=naver&utm_medium=original&utm_campaig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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