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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사랑을 위해 고생하는 게 幸福… 인생 되돌릴 수 있다면 60세로"
작성자 최고관리자 날짜 2015-07-04 10:32 조회수 7542
['永遠과 사랑의 대화' 그 뒤… 지금도 강연하는 96세의 철학자 김형석] "나는 교수 외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살아와 80년대 시국성명 서명 안 한 건 지성인 자세 아니라고 봤기 때문" "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거의 운동도 안 해요 내게는 일할 수 있는 그만큼의 건강만 있으면 돼" 우리 나이로 100세에서 네 살 빠지는 96세의 김형석 선생이 한 방송에 출연해 강연하는 걸 보면서 내 눈을 믿기 어려웠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모르겠지만, 한 시절 젊은 사람들은 밤늦게 '고독이라는 병(病)' '영원(永遠)과 사랑의 대화' 같은 그의 인생론 수필을 읽으면서 성장했다. 그 과거 속 인물이 지금도 강연과 방송 출연,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약속 장소로 정한 이화여대 후문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니, 그는 젊은 카페 분위기에 잘 어울리게 앉아 있었다. 김형석 선생은“고별 강연을 마치고 집에 오니‘내가 교수답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형석 선생은“고별 강연을 마치고 집에 오니‘내가 교수답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장련성 객원기자 ―놀라울 따름입니다. 혹시 집안 내력이 장수(長壽)입니까? "부친은 아니지만, 모친은 100세까지 사셨어요. 내가 6남매 맏이인데 동생들도 팔순을 다 넘었네요. 나는 어려서 건강이 안 좋았어요. 열네 살 무렵 경기(驚氣)와 졸도가 심해 저러다 죽을 줄 알았대요. 건강상 중학교도 못 갔어요.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나를 건강하게 해주면 평생 하느님을 도와 드리겠다'고 기도했어요. 다음 해부터 병치레가 덜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늘 조심했어요. 내 몸에 무리가 갈까 봐 운동도 안 했어요. 50대 후반에 수영을 시작한 걸 빼고는." ―운동을 적게 하는 것이 장수 비결처럼 들립니다. "내게는 일할 수 있는 만큼의 최소한 건강만 필요해요. 생전에 안병욱(安秉煜·전 숭실대 교수) 선생은 정신적 긴장을 주는 공부와 여행, 연애가 장수 비결이라고 했어요. 내가 '그걸 알면서 당신은 왜 늙었나?'하고 농담하니, '연애를 못 해 그렇다'고 답하더군요(웃음)." ―특별히 몸에 좋은 음식을 드신다든가, 다른 무엇이 있을 텐데요? "나는 뭐든지 먹어요. 술은 체질에 안 맞아 못 마시지만 커피는 지금도 두 잔쯤 해요. 잠도 잘 자요. 밤 11시부터 아침 6시까지 자고, 낮잠을 30분쯤 자요. 비행기를 타면 앉는 순간 잠들어요. 요즘은 버스에서 조느라 정류장을 지나칠 때가 잦아요." ―저는 선생님과 꼭 40년 차이가 있습니다. 정말 궁금한데, 96년 세월의 길이는 어떻게 느껴집니까? "누가 내 나이를 말하면 '벌써 그렇게 됐나' 느끼지, 길게는 안 느껴져요. 노인들은 '하루는 길고 일 년은 빨리 간다'고 해요. 하루가 길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강연 나가고 글을 써요. 어제도 작은 글 한 편을 끝내고, 그저께도 그랬고…." ―나이가 들면 옛날에 썼던 글을 자기도 모르게 또 쓰게 되지 않습니까? "몇 십 년째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일기를 쓸 때면 재작년·작년 그날의 일기를 먼저 읽어봅니다. 내 사고력이 재작년·작년보다 올라갔나 내려갔나를 체크하는 거죠. 일기 분량도 노트 한 페이지씩 써요." ―한 페이지씩이나? 어제나 오늘이나 같은 일상의 반복인데요. "나는 머릿속 생각을 쓰니까요. 가령 신문·TV에서 뉴스를 보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걸 쓰는 거죠. 글을 쓰는 능력도 유지되죠," ―11년 전 사별한 뒤로 혼자 사신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나이 들면 고독감이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혼자구나 하는. 과거에는 해외여행에서 돌아올 때면 '빨리 가야지' 했지만, 지금은 돌아오기 싫어요." 철학자 김형석(왼쪽). ―재혼(再婚)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까? "노년의 재혼은 우리 사회와 가족 시스템에서는 쉽지 않아요. 동거(同居)를 선언하고 살면 몰라도…. 같은 동네에 아들이 살고 있지만 3자(者) 같아요. '너는 너고 나는 나로구나'를 느낍니다. 그런 고독을 못 이겨요." ―선생님은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에서 고독은 창조의 원천이라고 했지요? "옛날에는 생각으로 그렇게 썼고, 살아 보니 그걸 이기는 게 어려워요. 나이 들면 창조적 고독이 아니라 생리적 고독이지요." ―철학자인데 인간은 결국 홀로 가야 하는 숙명이란 걸 단련하지 못했습니까? "한창 일할 때는 땅과 거리가 멀었는데, 이제 땅으로 가려고 하는지 생리적인 고독이 심한 거죠. 언제부터인가 나는 2년 단위 계획만 세웁니다. 그 뒤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선생님의 연세에 죽음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 듭니까? "가까워지니 생리적인 두려움이 있지요. 소도 도살장에 가까이 가면 본능적으로 울지 않습니까. 하지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을 위해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죠. 이를 위해 나를 바칠 수 있다면 죽음을 이기는 삶이 되겠지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뭘까요? "사랑하는 사람, 이웃, 사회, 국가가 그런 대상이 될 수 있겠지요. 나이가 드니까 나 자신과 내 소유를 위해 살았던 것은 다 없어져요. 남을 위해 살았던 것만이 보람으로 남아요." ―만약 인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나이로 가고 싶은가요? "60세로 돌아가고 싶어요." ―예상 밖입니다. 젊음을 갖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요. "젊은 날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는 생각이 얕았고 행복이 뭔지 몰랐어요." ―저도 20대로 돌아가라면 그 무모한 젊음을 다시 감당해낼지 자신이 없습니다. "김태길(金泰吉)·안병욱 교수와는 동갑인 데다 전공도 같아 친했지요. 생전에 이분들과 '우리 인생에서 노른자의 시기가 언제였을까'로 대화한 적이 있어요. 답은 65세에서 75세까지였어요. 그 나이에야 생각이 깊어지고, 행복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됐거든요." ―선생님이 알게 된 행복은 어떤 것입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 '사랑이 있는 고생'이 행복이지요." ―평생 정신과 지식으로 살았으니, 한번 기회가 주어지면 거꾸로 육신과 물질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습니까? "몇 년 전 이건희 회장이 저녁 식사에 대기업 총수들을 초대해 고급 불란서 와인을 마셨다는 게 보도됐어요. 그때 나는 '저 사람들은 고급 와인을 마셔 행복하다지만 내가 마음에 드는 글을 끝내거나 시 한 편을 읽고 눈물을 흘릴 때의 행복은 못 맛볼 거다'라는 생각을 했죠." ―동의하기 어려운데요(웃음). 학자로 살아오면서 회의를 느낀 적은 없습니까? "내 제자를 사랑하고 더 잘 도와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있지 회의는 없어요. 회의가 없었던 만큼 행복했다는 거죠. 아마 어렸을 때 '내가 건강하면 하느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기도가 바탕이 됐기 때문인지 모르지요." ―독실한 기독교인이지요? "그렇다고 교회를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知性)적인 고민을 하면서 목사의 설교를 받아들일 수는 없거든요. 예수님은 교회를 지키기 위해 교리를 가르친 게 아니지요. 예수님 자체가 우리의 인생관·가치관이 돼야지요." ―선생님은 한때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키르케고르에게 심취했지요.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신의 뜻과 무관하게 현실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인데, 기독교 신앙과 상반되지 않는가요? "키르케고르에게 심취한 것은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무신론적 사상에 빠졌지만 가보니까 결국 회의(懷疑)였어요. 그 뒤 도스토옙스키(러시아 작가·'죄와 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를 읽으면서 기독교로 돌아왔어요." ―몇 년 전 이어령 선생이 기독교에 귀의한 것도 그렇고, 지성인들이 만년(晩年)에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인간은 신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이기 때문일까요?. "파스칼(1623~1662·프랑스 사상가)은 '인간은 비참해질 수 있다. 스스로 힘으로는 구원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인간은 환희(歡喜)를 누릴 수 있다. 스스로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런 비참과 환희를 다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의지해야 한다'고 했어요." ―만약 신이 없다면 인간이 신을 만들어서라도 있게 해야 한다는? "이를 '요청적 유신론(有神論)'이라고 하지요. 신이 존재하도록 인간이 요청한다는 거죠." ―선생님은 '영원과 사랑의 대화'라는 책으로 젊은이들을 많이 위로했지만, 유신(維新)과 5공 정권 시절 '사회 참여 지식인'은 아니었지요? "나 같은 사람은 편안히 살았죠.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두 번 잡혀갔고, 5공 시절에는 잡혀갈 뻔했다가 '6·29 선언'으로 해소됐어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신 시절에 '자유(自由)의 조건'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려다 잡혀가 추궁을 받았지요. 이들은 '자유'를 투쟁과 연관해서 본 거죠. 나는 이성적 사고를 해야 자유를 말하고 누릴 수 있다는 내용으로 강연하려던 것인데…. 그 시절 함께 일하자는 제의도 받았지만, '나는 교수다운 교수였다는 소리를 듣는 게 소원이다. 정권에 들어가면 그런 내 인생이 없어진다'고 했어요." ―1980년대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를 지지하는 교수들의 시국 선언이 잇따랐을 때, 선생님은 서명하지 않았지요? "내가 개인으로 시국 강연을 할 수는 있지만, 집단 서명은 하지 않는다고 했죠. 집단 서명은 자유로운 지성인의 자세와 어긋나기 때문이죠. 나는 교수 외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으려고 했지요. 학내에서 후배 교수들이 감투(보직)를 추구하는 걸 보고 '연세대가 좋은 대학이 될 때가 언제인 줄 아느냐. 총장의 존경을 받는 교수가 많을 때다'라고 했어요." ―시국 선언 서명을 거부했을 때 교수 사회나 학생들한테 오해를 사지 않았습니까? "많이 받았죠. 하지만 1985년 9월 정년 퇴임하면서 고별 강연이 잡혔어요. 그날 데모가 몹시 심했는데도 대형 강의실이 곽 찼어요. 학생들이 데모를 하다가 들어온 거예요. 자욱한 최루탄 냄새 속에서 고별 강연을 했어요. 그날 집에 와서 '그래도 내가 교수답게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1시간 반 넘게 자리를 함께했지만 그가 96세임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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